[다섯걸음 2] chapter 4

군산시민연대
2025-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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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태희

 

인생에서 지우개로 지우고 싶은 시기가 있다면 언제를 지우면 좋을까? 난 지금을 지우고 싶을까? 아니 나에게 필요한건 지우개가 아니라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갈 타임머신 아닐까?

지금 당장 이런 지우개가 나에게 필요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없어졌던 지우개의 행방은 찾은듯 싶다. 맨날 잊어버리고 다시 산 지우개가 흔하디 흔한 AIN 지우개였고 맨날 지우개를 잊어버리는 민지의 자리에서 거리가 좀 있지만 그래도 그 줄 가장 뒤 책상에서 남자 애들이 모여 각자의 지우개를 놓고 경기를 하고 있었다.

평소 지우개의 존재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수학문제를 풀 때 틀린 부분이 생겨 다시 고쳐 풀라고 하면 필요하다. 또는 지우개 따먹기를 하는데 모든 지우개를 잃고 나의 본전 지우개 마저 없다면 어떻게 해서든 필요해진다.

그들에게 학교 앞 문방구에 달려가 지우개를 사오기는 너무 멀고 시간이 오래걸린다. 만약 교문을 나가 사온다고 해도 쉬는 시간이 끝나 수업이 이미 시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교문을 나가는 것 자체가 선생님들 한테 좋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른 친구에게 지우개를 빌린다면? 하지만 빌리면 결국 다시 하나를 갚아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쉽게 지우개를 얻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방심하고 있는 같은 반 학우의 지우개를 노렸다. 그들에게 이 것이 가장 쉽고 빠르게 한 경기 더 할 수 있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난 지우개를 5개나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내가 샀던 지우개와 비슷 한게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 그런 지우개라 내꺼라는 증거도 없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하고 싶어하는 줄 알고 한 판 할꺼냐고 눈짓으로 물어본다. 하지만 경력과 그들이 쌓은 지금까지 경험을 초심자인 내가 이길 순 없겠지. 고개를 젓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들 중 지우개를 가장 많이 갖고 있던 쩐주가 지우개 하나를 나에게 던져 줬다. 한 번에 잡지 못하고 지우개가 교실 바닥을 굴러간다. 지우개가 굴러간 공간을 쭉 훑어 닿은 곳은 가영이가 앉아 있는 자리였다.

몇 일전 양호실을 갔다 온 이후 대화를 나눠본적이 없다. 그래도 나는 지우개를 주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지우개를 잡으려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가영이와 내 머리가 부딪혔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친구들이 웃는다. 지우개를 줍고 고개를 들어 가영이를 올려다 보는데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가 보였다. 그 모습에 머리는 아파 죽겠지만 하나도 안 아픈 척 정수리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에서 의자를 빼고 앉자 마자 가영이를 쳐다봤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옆자리 친구와 무슨 이야기 인줄 모르겠지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짧게라도 사과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와 처음으로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났었다. 좋아하는 건 조금씩 달라도 둘다 만화와 웹툰을 좋아한다. 내가 만화 추천하면 다음엔 가영이가 웹툰 추천하고 다음날 하루 종일 만화와 웹툰 이야기를 나눴다. 최애가 같아도 좋았고 달라도 겹치지 않아 좋았다. 노래방에 가서 돈만 있다면 둘이서 하루 종일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치면 마라탕 먹으러 가고 가끔 떡볶이도 먹고 커피숍도 한 번씩 갔었는데... 이제는 서로 말도 안 거는 친구가 됐다.

 

수업이 시작 됐다. 이번 시간은 수학시간이었다. 필기하고 문제 풀고 선생님 설명을 듣다 보니 방금 전까지 고민하던 것을 잠시 잊었다. 그렇게 문제를 푸는데 옆자리 민지가 지우개를 빌려달라고 했다.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빌려줘 말어 부터 지난 잊어버린 5개의 지우개와 민지에 대한 가영이와 나눴던 대화들, 교실에서 있었던 민지의 높은 울부짖음 등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지우개를 바라보곤 지우개에 입혀있던 종이를 찢었다. 그리곤 앞 뒤에 매직으로 ‘태희’ 써 넣었다. 이 방법 또한 임시방편이겠지만 지금 한 순간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민지에게 지우개를 넘겼다. 수학 문제의 정답을 알지만 풀이 과정에서부터 일부러 틀리게 적어본다. 그리곤 민지에게 지우개를 달라고 말한다. 지우개에 내 이름이 앞뒤로 적혀 있는 걸 확인한다. 그리곤 사용한다.

오늘 난 지우개를 사수했다. 이 지우개가 비록 쩐주의 손에서 날아와 가영이가 앉아 있던 책상에 내 정수리를 희생하며 얻은 거지만 나에겐 값진 지우개였다.

문제를 정확히 풀고 정답을 적은 뒤 필통에 지우개를 다시 넣었다. 이젠 내 물건을 쉽게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마 가영이와의 문제는 지우개에서 부터 시작 됐을 수도 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 했지만 생각보다 별거였다. 쉽게 생각하지 않고 진지하게 듣고 답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가 밀려오지만 지금 당장 서로의 어긋난 감정을 되찾을 수 없을거 같다.

우리의 자리는 너무 멀었고 문제의 근원은 아직 나와 가까이에 있다. 다음 자리를 바꾸는 날이 우리의 우정을 되찾을 기회가 될 수 있길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