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로 생각하며 살기

군산시민연대
2021-12-06
조회수 40



내 머리로 생각하며 살기

 나는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값이 얼마인지 따지지만, 대체로 사용하는 원료나 만드는 과정이 내 건강을 해치리라는 생각은 않고, 유통기한 날짜만 보고 사는 편이다. 생산자와 제조사와 유통사와 슈퍼마켓 주인을 자연스레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첫 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이용하기 때문에 나도 믿고 따라서 이용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가 만들 수 없고, 필요하기 때문이니 생산 공정을  믿고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설마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만들어 팔겠는가하는 인간의 윤리의식을 은연중에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 이 믿음에 금이 가서 -과장 광고, 원산지와 성분 속이기-사람들이 피해를 보기도 한다.)

 

 누군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몸을 상하게 하는 사건이 벌어지면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기소하고, 판사가 선고하면 교도소에서 죄 값을 치른다. (약자-돈 없는지-들은 대부분 그렇게 되지만 강자-돈 많은 자-들은 대부분 그렇게 안 된다.)경찰과 검찰과 판사를 대체로 신뢰하는 편이라서 우리는 의심 없이 그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사회는 믿음으로 통제되고, 조화롭게 흘러가는 듯이 보인다. 사실 상호신뢰가 없으면 사회는 돌아가기 힘들다.

 

 어떤 언론이 특정사건에 의혹을 가지고 보도하면 세상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해왔던 것처럼 의혹인데도 불구하고, 의심 없이 그 기사를 신뢰한다. 의혹당사자는 '아니요‘라고 반박에 나선다. 언론은 의혹을 더 부풀린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려 애써보지만 때는 늦었다. 사람들의 뇌리에 부정적으로 박히는 순간 사건의 진실여부에 관계없이 그 사건은 기정사실화가 된다. 되돌리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되돌렸더라도 피해후유증은 막강하다. 언제 어느 때든 그와 유사한 사건이 터지면 자동적으로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며 세간에 떠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이득을 보려는 무리들이 활용 가능한 모든 매체를 이용하여 아니면 말고식 정보 전달과 보도를 일삼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머리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들의 낚싯밥에 걸리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살게 될 것이다.

 

 과학은 수 천 번의 실험을 통해  물이 100도씨에서 끓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확실한 진리인양 우리에게 믿으라 한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수 억 번을 실험해서 95도에서 물이 끓는다는 데이터를 제공하고 논리적 주장을 펼치면 100도는 묻히고 95도만 살아 숨 쉰다. 우리들은 사실 물이 몇 도씨에 끓든 상관없다. 라면 끓이기에 적당하면 그만이다. 스마트폰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는 몰라도 휴마트폰 사용법만 알면 , 페이스북에 카카오톡에 구글에 빠질 수 있다.(여기에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소프트웨어 혹은 게임, 플랫폼 개발업자들이 선한 마음으로 옵션을 미리 만들어 놓고 사용자들을 위해 간편하게 클릭만하면 되게끔 해 놨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희한하게 클릭을 하고, 내 정보를 제공하면 그 곳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기 힘들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동원리를 그들은 알고 우리는 모르기 때문이다.)

 

 과학의 업적을 통해 지금까지 진리처럼 알려져 왔더라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면 예전의 것은 죽은 지식이 되어 백과사전 한쪽에 묻힌다. 천동설은 지동설에 자리를 내주면서 간혹 시험문제에 나오는 죽은 지식이 되었다 .(과학자들이 관측으로 실험으로 지구가 초당 수십만 키로의 속도로  태양을 돌고 있다하고 책마다 그렇게 쓰여 있고 과학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안다. 혹 모르지 않나 어떤 정밀한 과학자가 태양도 공전하고 모든 행성들이 제멋대로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저명한 과학자들이 손을 들어주면 지동설도 밀려날지 말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지동설이든 천동설이든 몰라도 그리 상관없다. 비가 왜 내리는지는 몰라도 비가 오면 우산을 쓰면 된다. 홍수를 예상하고 둑을 쌓고, 가뭄을 예상하여 저수지를 만들 뿐이다. 둑을 무너뜨릴 저수지를 넘치게 하는 비가 오면 과학으로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는 현재의 지구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관심이 있다. (그렇다고 과거의 영향과 흔적을 아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몸으로 맘으로 실재하는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학이 이룩한 문명의 수단과 도구의 도움을 받으며,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시로 소설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연극으로 철학으로 말하는 인문학의 안내를 받으면서, 그 때 당시의 화려하고 솔직한, 있을 법한 이야기를 통해 지금 시대에 따뜻한 위로와 성찰의 기회를 주는 교훈으로 삼기도 하면서 말이다. 과학은 하나의 정답을 내놓고 따르라고 말하고, 인문학은 각자의 해답-길-을 찾으라고 말한다.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국가니 사회니 시장이니 하는 말을 잘 모른다. 국가가 있어야 국민이 산다고 하니 그런 줄 안다. 국가에 세금을 내고, 청탁이나 불법, 비리로 새어나가지 않고 남은 예산의 혜택을 받으며 산다. 사회는 위계질서가 있어야하고 갑질을 당해도 아니꼽지만 이겨 내야하고, 기어이 갑질하는 자리에 올라갈 때까지 동료를, 친구를 적으로 삼아 경쟁하고, 짓밟고 서야 산다고 말한다. 자본가가 돈을 대지 않으면 생산수단이 생기지 않고 일자리가 없게 되어 살 수 없으니, 노동자는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시장의 원리에 따라 상품이나 생산하라고 말한다. 지도자가  정치인이 전문가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 왔다. 왜 그렇지? 과연 그럴까? 라는 의문을 품고, 질문하고, 우리 스스로 대답을 찾으려 공부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들의 생각대로 또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요즘 한참 주가가 올라가고 있는 “사피엔스”의 작가, 유발하라리는 “국가는 허구다.“라고 말한다. 국가는 몸이 없고, 아파하지 않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은 (나는 식물도 인간과 동물처럼 몸이 있고, 감정이 있어서 아파한다고 믿는다.) 몸이 있고 아파하니 실재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 싶다. 국가나 사회나 시장은 허구(虛構 : 사실이 아닌 일을 사실처럼 꾸며서 만듦. 실제로는 없는 이야기를 작가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만듦.)다. 그것은 아파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숨 쉬는 실재인 우리만 아파한다. 허구를 실재한다고 믿고, 무작정 따라간다면 실재하는 인간은 무엇인가? 말 잘 듣는 종이란 말인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왜 주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어릴 때는 부모가 보살피며 아이의 특성에는 관계없이 어린애는 어떻게 행동(어른이 물어보면 씩씩하게 대답하고, 인사할 때는 손을 배꼽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라고 하라는 둥 이것저것)해야 하는지 미리 알려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핀잔을 주면서 익숙하게 반응하도록 훈련을 시킨다. 학교에 가서는 시험범위를 달달 외우게 하고, 점수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주입식 경쟁씩 교육을 받아서 그렇기도 하고, 스스로 사유하거나 사유하는 방법을 몰라서 또는 배우지 않아서기도 하다. 의심을 품으면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불량하게 보이기 때문이며, 어른이 얘기하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야지 반항하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타박을 받거나 공동체에서 따돌림을 당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예'라고 말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용기를 가지라고 방송에서는 때로 말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하며, 집중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주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주장을 펼치지 못한다. 다수의 사람들과 의견이 다르거나 대들면 반항이며, 낙인찍히고 따돌림 당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이제까지 맹목적으로, 습관적으로 믿어왔던 모든 것에, 시간을 들여, 의문을 품고 숙고해보라. 남의 주장을 내 생각처럼 말하지 말고, 내 삶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을 되새겨 보는 독서를 통해, 내 몸으로 걷는 산책(혹은 여행)과 내 머리로 생각하는 깊은 사색을 통해 얻게 되는 깨달음을 주체적으로 말하여 보라. 세상을 타인이 제시해준 방식대로 보거나 살지 말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보고 살아가라. 그렇다고 세상의 시류에 뒤처지거나, 사회적 윤리나 인간관계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지도자, 정치가,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강요할 때 억압과 폭력이 생기는 것이다. 나만의 생각을 간직하며 기쁨을 누리고,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고,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며, 분노할 때와 연대할 때와 실천 할 때를 알아 일어서는,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에서,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손으로 뽑는 것이야말로 자유(개인의)와 평화(타인과의)를 향한 힘찬 첫걸음이다.

 

강태호(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