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도 되는 것이냐?
[출처-이철수의집]
예견된 막말
드디어 윤 대통령이 전 세계적으로 사고를 쳤다. 비속어를 써가며 바이든 대통령의 처지를 예상하는 막말을 해버렸다. 이렇게 붙이든 저렇게 붙이든 국회는 ××가 되었고, 바이든은 ×팔리게 되었다. 우리는 ××과 ×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지도자가 생각 없이 살면 술 먹으면 먹은 대로, 취하면 취한대로, 말 나오면 나오는 대로 살게 되고, 타인에게 특히 민중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민중을 향해서 말을 할 때는 단어를 가려 쓰고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하고 귀담아듣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날그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준비 없이 말을 뱉어내는 것은 민중에게 전권을 이양받아 나라를 다스리고 애쓰는, 민중을 섬기는, 민심을 헤아리려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하였다고 착각에 빠진, 민중을 하인으로 부리려는, 권력자나 하는 모양새다.
사과를 사건으로 키우는 변명
시답잖은 변명을 일삼는 여당 정치인과 대통령실은 더 난리다. 대응한다는 꼴이 막말을 감추고 축소하려다 진실은 왜곡되고 의혹은 점점 더 커지고 말았으며, 길거리 대통령은 입장발표 한답시고 동맹국과의 관계를 훼손하는 보도라고 해명하라는 헛다리를 짚는다.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방송사로 몰려가 항의 방문한다고 떠들고, 대통령실은 한술 더 떠 방송사에 보도 경위를 물으며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들끓는 민중의 귀와 눈을 완전히 무시하고, 어린애 소꿉장난하듯 어르고 뺨 때리듯 막장으로 가고 있다. 실언한 대통령이 탁월하다고 말하는 애꿎은 (물론 외교 참사에 대한 책임은 있다.)외교부 장관 자르지 말고, 실언하는 대통령 옆에 귀를 쫑긋 세우며 기울여 듣던 수행원들이 들은 대로 말하거나 대통령이 "실언해서 죄송하다."라고 민중에게 사과하면 되는 것을. 녹취전문가를 대동하여 음성을 분석했더니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는 웃기는 장면을 연출하며, 심지어 문제의 장면을 송출했던 방송사 사장과 기자를 고발하며 걷잡을 수 없는 사건으로 번지고 있다.
조그만 일을 숨기거나 속이거나 변명만 일삼으면 목숨을 거는 일이 되고, 조그마한 다툼을 참지 못하면 싸움으로 번지고 서로를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한다. 참으로 어렵다. 나에게는 사소한 일이 남에게는 큰일이 되고, 나에게는 큰일이 남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때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의 차원에서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고, 그런데도 판단에 동의하지 못하는 뭇 타인들의 반발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멀지 않았다. 다가오는 2024년 총선 때는 축소와 변명에 가담한 의원과 그 당은 모든 의석을 잃을 각오를 하고 사생결단하거나, 대통령을 탈당시키든 해야 겨우 목숨 줄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막가는 새만금 신공항 사업
환경을 죽이고 사업성은 전혀 없는 생명체의 보고인 수라 갯벌 메워, 비행기 격납고는 겨우 5개, 활주로는 짧고, 화물 운송 비행기는 뜨지도 못하는, 허울 좋게 지역경제를 살린다고 민중의 혈세를 뜯어 공항을 건설한단다. 어찌어찌 비행기가 뜨더라도 해마다 수십만 마리의 철새가 이동하여 비행을 방해하고, 비행기에 부딪힐 경우가 많은, 미국이 대중국 견제 전초기지로 삼아 전쟁이 나면, 훈련하다 심심하면 전투기 활주로로 사용하는, 공항을 짓겠다고? 수라 갯벌을 지키는 갯지렁이가, 터줏대감 흰발농게가, 철 따라 갯벌을 오가는 새가 웃겠다.
코로나 여파로 여행객의 발이 묶인 것도 있지만 조그만 나라에서 한 시간이면 다른 좋은 공항을 갈 수 있는데 굳이 사업성도 없고, 찾는 이도 드문 공항을 생짜로 만들겠다는 것은 이 사업과 관련되어 이득을 보는 무리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국회의원 나리를 포함해 권력과 자본을 움켜쥔 세력 중에 이해방지충돌법에서 자유로운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또 터진 색깔론
아직도 김일성 타령이다. 한때는 노동운동을 했다던 한 인사가 국회 국정감사 석상에서 전 대통령을 김일성주의자라 막말을 쏟아내고 퇴장당했지만, 예전에 비리와 무능으로 얼룩진 두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책임이 있다며 총살감이라 말한, 자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기세가 등등하다. 어쩌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참으로 측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먹고살 만하고, 국회의원도, 도지사도 했으니 그만하면 명예도 권력도 얻었을 터인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게 했을까? 민중들을 반으로 쪼개 불협화음 속에 떨어지는 떡고물을 주워 먹으려 그러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속이 좁다. 그렇지 않고 뼛속까지 공산주의 혐오자라서 그런다면 그렇게 삶을 살아가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혹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규합해서 대권에 도전하여 대한민국을 극우 자유주의자가 판치는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한술 더 떠, 대통령은 북한을 따르는 주사파는 반국가 적대세력이고 반헌법적이기 때문에 협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의 야당과는 협치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찌 좀 이상하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판을 키우며 막장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평화통일에 "평"자라도 꺼냈다가는 종북주사파로 몰릴 판이다. 극우 자유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을 그려보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에게 빨갱이들을 빨리 솎아내지 않는다고 호되게 멱살잡이를 당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읽고 있는 위의 책 속에 있는 여러 단편 중 "위대한 똥파리"의 줄거리는 이렇다.
“파리들이 반지하에 살고 있다. 빛이 비치는 시간은 짧고, 그늘지는 시간은 빨라서 대부분 어둠 속에서 파리들은 시간을 보낸다. 밝은 곳으로 가고 싶긴 하지만 창문이 가로막혀 있고, 어둠에 익숙하여져서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젊은 똥파리 하나가 반지하 창문으로 보이는 밝은 세상을 동경하고, 창문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품고 매일 창문을 향해 돌진한다. 저기는 창문이라 뚫지 못한다고 다친다고 늙은 똥파리들은 말하며 그만두라 하고, 젊은 똥파리는 저기 빛이 있는데 저 창문만 넘어서면 밝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데 왜 죽치고 있느냐고 항변하며 매일 더 센 힘으로 돌진한다. 드디어 머리가 깨지고 피가 터져 창문에 늘어 붙어 죽고 만다. 말리거나 방관하던 파리들은 그날을 기념하며 그의 용기를 기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똥파리들의 사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지하 집주인은 창문에 더럽게 눌어붙은 파리를 닦아낸다.”
작자는 이야기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는 파리들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진실은 있다. 어둠 속에 죽치고 앉아 있는 파리의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얘기는 파리의 역사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창문을 통과하려는 똥파리의 도전과 희망, 그리고 죽치고 있는 파리들을 풍자하고 있다. 똥파리를 인간으로 바꾸어보자. 보이지 않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무리 민중이 분투해서 기념비를 세워도 그 유산이 대대손손 이어지지 않으면 유리창이 닦인 것처럼 사라진다. 역사에 남기 위해 창문을 통과하려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다. 빛 속에서 맘껏 누릴 자유를 찾기 위해 용기 내어 싸우는 것이다. 헌법에 인간에겐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씌어있다고 자유로워지거나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와 권리는 그것을 제한하려는 세력과 싸워서 찾는 것이다. 분투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야기는 역사가 되고, 하나의 교훈으로, 새로운 대안이 될 씨앗을 품고, 미래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들은 잊고 있는 것인가, 잊으려고 하는 것인가. 민중이 안겨준 권력과 타인의 배려로 얻은 자유를 머리 달린 몸이라고, 터진 입이라고 맘대로 지껄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보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지난 역사의 업적과 교훈을 깡그리 무시하고, 죄과를 입어 심판받은 자들의 그림자를 따르겠다고 외치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 활개를 치고 있는데, 모르는 채 죽치고 있어도 되는 것이냐? 대통령은 20%대 지지율을 넘어서지 못하고 많은 사람은 국정을 잘못하고 있다고 외치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냐? 염치도 없고, 사익을 위해서는 목숨 걸고 달려드는 그들과 치고 패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뭐라도(시위푯말이라도, 촛불이라도) 들어서 항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나라가 추락하는데 뒷짐을 쥐고 있어도(시위에 나가지 않아도, 촛불을 들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장성했을 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아버지(어머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는 당시에 무얼 하고 있었어요?" 늙은 똥파리처럼 죽치고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리하라.
강태호(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대표)
이래도 되는 것이냐?
예견된 막말
드디어 윤 대통령이 전 세계적으로 사고를 쳤다. 비속어를 써가며 바이든 대통령의 처지를 예상하는 막말을 해버렸다. 이렇게 붙이든 저렇게 붙이든 국회는 ××가 되었고, 바이든은 ×팔리게 되었다. 우리는 ××과 ×이 무엇을 뜻하는지 안다. 생각하고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지도자가 생각 없이 살면 술 먹으면 먹은 대로, 취하면 취한대로, 말 나오면 나오는 대로 살게 되고, 타인에게 특히 민중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된다. 민중을 향해서 말을 할 때는 단어를 가려 쓰고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신뢰하고 귀담아듣고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날그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준비 없이 말을 뱉어내는 것은 민중에게 전권을 이양받아 나라를 다스리고 애쓰는, 민중을 섬기는, 민심을 헤아리려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하였다고 착각에 빠진, 민중을 하인으로 부리려는, 권력자나 하는 모양새다.
사과를 사건으로 키우는 변명
시답잖은 변명을 일삼는 여당 정치인과 대통령실은 더 난리다. 대응한다는 꼴이 막말을 감추고 축소하려다 진실은 왜곡되고 의혹은 점점 더 커지고 말았으며, 길거리 대통령은 입장발표 한답시고 동맹국과의 관계를 훼손하는 보도라고 해명하라는 헛다리를 짚는다. 여당의 국회의원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방송사로 몰려가 항의 방문한다고 떠들고, 대통령실은 한술 더 떠 방송사에 보도 경위를 물으며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들끓는 민중의 귀와 눈을 완전히 무시하고, 어린애 소꿉장난하듯 어르고 뺨 때리듯 막장으로 가고 있다. 실언한 대통령이 탁월하다고 말하는 애꿎은 (물론 외교 참사에 대한 책임은 있다.)외교부 장관 자르지 말고, 실언하는 대통령 옆에 귀를 쫑긋 세우며 기울여 듣던 수행원들이 들은 대로 말하거나 대통령이 "실언해서 죄송하다."라고 민중에게 사과하면 되는 것을. 녹취전문가를 대동하여 음성을 분석했더니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는 웃기는 장면을 연출하며, 심지어 문제의 장면을 송출했던 방송사 사장과 기자를 고발하며 걷잡을 수 없는 사건으로 번지고 있다.
조그만 일을 숨기거나 속이거나 변명만 일삼으면 목숨을 거는 일이 되고, 조그마한 다툼을 참지 못하면 싸움으로 번지고 서로를 죽이는 일이 되기도 한다. 참으로 어렵다. 나에게는 사소한 일이 남에게는 큰일이 되고, 나에게는 큰일이 남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때도 있으니 말이다. 결국,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의 차원에서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고, 그런데도 판단에 동의하지 못하는 뭇 타인들의 반발을 감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멀지 않았다. 다가오는 2024년 총선 때는 축소와 변명에 가담한 의원과 그 당은 모든 의석을 잃을 각오를 하고 사생결단하거나, 대통령을 탈당시키든 해야 겨우 목숨 줄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막가는 새만금 신공항 사업
환경을 죽이고 사업성은 전혀 없는 생명체의 보고인 수라 갯벌 메워, 비행기 격납고는 겨우 5개, 활주로는 짧고, 화물 운송 비행기는 뜨지도 못하는, 허울 좋게 지역경제를 살린다고 민중의 혈세를 뜯어 공항을 건설한단다. 어찌어찌 비행기가 뜨더라도 해마다 수십만 마리의 철새가 이동하여 비행을 방해하고, 비행기에 부딪힐 경우가 많은, 미국이 대중국 견제 전초기지로 삼아 전쟁이 나면, 훈련하다 심심하면 전투기 활주로로 사용하는, 공항을 짓겠다고? 수라 갯벌을 지키는 갯지렁이가, 터줏대감 흰발농게가, 철 따라 갯벌을 오가는 새가 웃겠다.
코로나 여파로 여행객의 발이 묶인 것도 있지만 조그만 나라에서 한 시간이면 다른 좋은 공항을 갈 수 있는데 굳이 사업성도 없고, 찾는 이도 드문 공항을 생짜로 만들겠다는 것은 이 사업과 관련되어 이득을 보는 무리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국회의원 나리를 포함해 권력과 자본을 움켜쥔 세력 중에 이해방지충돌법에서 자유로운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또 터진 색깔론
아직도 김일성 타령이다. 한때는 노동운동을 했다던 한 인사가 국회 국정감사 석상에서 전 대통령을 김일성주의자라 막말을 쏟아내고 퇴장당했지만, 예전에 비리와 무능으로 얼룩진 두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책임이 있다며 총살감이라 말한, 자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고 기세가 등등하다. 어쩌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되었을까. 그 사람만이 알 수 있으리라. 참으로 측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먹고살 만하고, 국회의원도, 도지사도 했으니 그만하면 명예도 권력도 얻었을 터인데 무엇이 그를 이렇게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하게 했을까? 민중들을 반으로 쪼개 불협화음 속에 떨어지는 떡고물을 주워 먹으려 그러는 것일까? 그렇다면 너무 속이 좁다. 그렇지 않고 뼛속까지 공산주의 혐오자라서 그런다면 그렇게 삶을 살아가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혹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규합해서 대권에 도전하여 대한민국을 극우 자유주의자가 판치는 세상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인가.
한술 더 떠, 대통령은 북한을 따르는 주사파는 반국가 적대세력이고 반헌법적이기 때문에 협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의 야당과는 협치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찌 좀 이상하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것을 판을 키우며 막장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평화통일에 "평"자라도 꺼냈다가는 종북주사파로 몰릴 판이다. 극우 자유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을 그려보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들에게 빨갱이들을 빨리 솎아내지 않는다고 호되게 멱살잡이를 당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읽고 있는 위의 책 속에 있는 여러 단편 중 "위대한 똥파리"의 줄거리는 이렇다.
“파리들이 반지하에 살고 있다. 빛이 비치는 시간은 짧고, 그늘지는 시간은 빨라서 대부분 어둠 속에서 파리들은 시간을 보낸다. 밝은 곳으로 가고 싶긴 하지만 창문이 가로막혀 있고, 어둠에 익숙하여져서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러나 젊은 똥파리 하나가 반지하 창문으로 보이는 밝은 세상을 동경하고, 창문 밖으로 나가려는 희망을 품고 매일 창문을 향해 돌진한다. 저기는 창문이라 뚫지 못한다고 다친다고 늙은 똥파리들은 말하며 그만두라 하고, 젊은 똥파리는 저기 빛이 있는데 저 창문만 넘어서면 밝은 세상으로 갈 수 있는데 왜 죽치고 있느냐고 항변하며 매일 더 센 힘으로 돌진한다. 드디어 머리가 깨지고 피가 터져 창문에 늘어 붙어 죽고 만다. 말리거나 방관하던 파리들은 그날을 기념하며 그의 용기를 기리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똥파리들의 사투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지하 집주인은 창문에 더럽게 눌어붙은 파리를 닦아낸다.”
작자는 이야기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어떤 길을 택할 것인지는 파리들 자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진실은 있다. 어둠 속에 죽치고 앉아 있는 파리의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얘기는 파리의 역사 그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둠을 벗어나 빛을 향해 창문을 통과하려는 똥파리의 도전과 희망, 그리고 죽치고 있는 파리들을 풍자하고 있다. 똥파리를 인간으로 바꾸어보자. 보이지 않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무리 민중이 분투해서 기념비를 세워도 그 유산이 대대손손 이어지지 않으면 유리창이 닦인 것처럼 사라진다. 역사에 남기 위해 창문을 통과하려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다. 빛 속에서 맘껏 누릴 자유를 찾기 위해 용기 내어 싸우는 것이다. 헌법에 인간에겐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씌어있다고 자유로워지거나 권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권리는 주어지지 않는다. 자유와 권리는 그것을 제한하려는 세력과 싸워서 찾는 것이다. 분투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야기는 역사가 되고, 하나의 교훈으로, 새로운 대안이 될 씨앗을 품고, 미래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들은 잊고 있는 것인가, 잊으려고 하는 것인가. 민중이 안겨준 권력과 타인의 배려로 얻은 자유를 머리 달린 몸이라고, 터진 입이라고 맘대로 지껄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가 보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지난 역사의 업적과 교훈을 깡그리 무시하고, 죄과를 입어 심판받은 자들의 그림자를 따르겠다고 외치는 자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 활개를 치고 있는데, 모르는 채 죽치고 있어도 되는 것이냐? 대통령은 20%대 지지율을 넘어서지 못하고 많은 사람은 국정을 잘못하고 있다고 외치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이냐? 염치도 없고, 사익을 위해서는 목숨 걸고 달려드는 그들과 치고 패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뭐라도(시위푯말이라도, 촛불이라도) 들어서 항변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나라가 추락하는데 뒷짐을 쥐고 있어도(시위에 나가지 않아도, 촛불을 들지 않아도)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장성했을 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아버지(어머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는 당시에 무얼 하고 있었어요?" 늙은 똥파리처럼 죽치고 앉아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리하라.
강태호(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