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려면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힘겨루기가 가관이다. 장관이라는 권력의 남용과 검찰총장이라는 무소불위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구경하고, 부추기는 언론과 소위 그들 뒷전에서 이득을 챙기는 재벌과 죽어나는 민중들이 있다. 세상은 권력을 가진 자의 놀음인가? 그들이 민중의 숨통을 움켜쥐고, 재벌과 검찰과 언론을 움직여 농락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준 자는 누구인가? 우리 민중들이 아닌가?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떻게 견디어야 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다시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야 하는가? 그러면 그 촛불의 힘을 배경으로 또 다른 권력이 탄생하고, 그 권력이 세상을 휘어잡는 놀음을 되풀이한다. 세상은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촛불(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권력은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법을 만든다. 민중을 위하는 법도 만들지만 그들의 입맛에 따라 법을 만든다. 자신들의 구린 구석이나 위치를 뒤흔드는 법은 잘 만들지 않는다. 만들어도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 알맹이는 쏙 뺀다. 1년마다 이만큼 했다고 의정 자료를 뿌리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한다. 그러다가 4년마다 지역에 나타나 자신들을 찍어달라 한다. 법을 만들어 재벌들의 법적 규제를 풀어주고, 검찰과 손발을 맞추어 형량을 조정한다. 심하면 자신이 그 수혜자 되어 수억의 돈을 꿀꺽하고 불체포특권으로 버티기도 한다.
재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권익을 앗아가려 노동자를 탄압했다. 전태일의 분신으로 근로기준법이 바뀌고, 노동자의 권리가 차츰 보장되자. 노동자를 사무직과 생산직으로 갈라놓아 갈등을 조장한다. 이것도 여의치 않자.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갈등을 조장한다. 노동자의 분열이 바로 그들의 행복인 까닭이다. 노동자가 싸워야 할 대상은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임금뿐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성과 싸워야 한다.
언론은 무엇을 먹고사는가? 바로 광고수익이다. 그렇다면 먹여 살리는 것은 누구인가? 재벌이다. 재벌을 홍보하고, 그들이 내는 돈으로 언론이 살아간다. 잘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언론은 재벌을 한 방에 보낼 기획과 논리가 있고, 민중을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어서 재벌이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론은 권력과 검찰과 재벌과의 관계에서 을이면서도 갑의 형태를 띤다. 여차하면 신상명세를 털고 자신의 몫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내는 돈 대부분 그들을 위해 써진다. 우리는 기껏해야 “시청자의 목소리”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그들이 짜놓은 판에 발을 들임으로써 그들에게 민중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순수하게 참여했는데 결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검찰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권력과 재벌과 언론과 민중들의 자세한 신상명세를 가지고 있다. 여차하면 한 방에 보낼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칼을 쥐고 있다 할 수 있다. 검찰에 복무하는 자들은 인품이 청렴해야 하고, 공정하고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바탕으로 역모를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유사한 또 다른 집단인 군인 집단이 있다. 우리나라는 상관이 명령하면 일치단결하는 군인들이 군기의 힘으로 5,16 쿠데타, 12·12사태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하고, “화려한 휴가”로 민중을 죽이고 권력을 잡지 않았는가.
민중들은 자신의 동네(지역)에만 관심이 있다. 나라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할 일꾼을 민원처리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일꾼들은 또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뒷전으로 하고, 다음에 다시 뽑혀야 하니 자기 동네 밥상을 잘 차릴 궁리만 한다. 그러니 나라도 이 모양, 동네는 저 모양이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좀 더 큰 정치를 하도록 동네 사람들이 감시하고, 격려하는 일을 늦추면 안 된다. 동네 사람들의 힘으로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뺏었다 하지 않는가. 왜 우리가 가진 이 큰 힘을 이권 찾아 헤매며 허투루 쓰는가? 참 안타깝다.
권력이 지시하고, 판을 짜고, 법을 만들고, 청탁하고 금품수수 하며 갖은 이권을 챙긴다. 재벌이 권력에 돈을 대고 자본 축적에 걸림돌인 규제를 푼다. 걸핏하면 방 뺀다고(한국을 떠난다며) 위협하며, 한통속이 짜놓은 판에서 맘대로 놀며, 재물을 쌓는다. 언론은 광고수익을 챙기며, 그들의 입맛대로 여론몰이해 주고, 뒷돈 챙기며 제 배 불리고 여차하면 배신의 칼을 휘두른다. 검찰은 죄질이 무거운 재벌은 석방하고, 죄질이 가벼운 민중은 징역을 살게 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좌우명으로 삼고, 일관되게 수사하고,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부를 축적한다. 그사이에 죽어나는 것은 민중이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질기게도 살았다. 아무리 촛불을 들고 불편부당함을 광장에서 외쳐도, 밀실에서 촛불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위해 이것저것 법 만들어 공표하면 끝난다. 민중들의 요구를 법으로 대체하고, 위안 삼으라 한다. 법대로 세상이 돌아가면 좋으련만 그 법은 가진 자들이 빠져나갈 빌미를 제공해주고 진정으로 민중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애꿎은 사람만 축나는 꼴이다.
권력을 함부로 잡고 휘두르지 못하게 인품을 보고 잘 선출하고, 검찰은 공수처를 출범시켜 누구든지 공정하게 철저히 수사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 재벌에게는 종부세를 적용하고, 갑질과 노동 탄압을 중지 시켜야 한다. 언론은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아 민중들을 현혹하지 말고, 권력과 재벌과의 밀실 고리를 끊고, 바르고 곧은 자세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민중은 깨어있어야 한다. 민중은 권력과 검찰과 재벌과 언론을 혁신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는 투표 참여와 낙선운동으로, 검찰에게는 청탁 거부와 공정거래와 청렴결백으로, 재벌에게는 불매운동으로, 언론에는 시청거부, 광고 거부, 구독 거부 운동으로 맞서면 된다. 다수의 민중이 한곳으로 모은 엄청난 힘이 혁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촛불로 보여주지 않았는가.
권력, 재벌, 언론, 검찰, 민중 그 단어 자체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 단어를 휘두르는 인간이 문제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틀렸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지금 지닌 인물이,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가 사람의 가치를 나타낸다는 말은 틀렸다. 자리는 관계없이, 지닌 것과 가진 것과 관계없이 그 사람의 품성(인격과 지성)이 누구를 (가진 자 1%냐 못 가진 자 99%냐) 어디(1%의 행복이냐 99%로의 행복이냐)를 향하고 있느냐에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 나는 어디(목적)를 향해가고 있는지. 나만의 욕심으로 남을 해치고 있지 않은지, 내 욕심으로 소중한 가정의 평화는 깨뜨리고 있지 않은지. 직장에서 승진을 위해, 실적을 위해 동료를 따돌리고, 울리고 고객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타인의 성취를 배 아파하고, 타인의 불행을 고소해하면서 불의는 모른 체하고, 비리는 그럭저럭 눈감아주며 사는 대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이렇게 해서 가려는 곳은 어딘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였다면 지금 자유로운가? 평화였다면 지금 평화로운가? 행복이었다면 지금 행복한가? 묻고 대답해보라. 세상은 결코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타인은 결코 스스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바꾸지 않으면 타인과 세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타인은 경쟁의 대상으로 세상은 지긋지긋해도 살아내야만 하는 세상살이로 기다리고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어찌해야 하나?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가는 방향을, 나를 바꾸어야 한다. 경쟁에서 협력으로, 무시에서 격려로, 질투에서 응원으로, 특혜에서 공정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적에서 다른 뜻을 가진 사람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나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의 행복으로 나를 바꾸고 방향을 바꿀 때, 내가 바뀌고 타인과 상생하며 세상이 바뀌어 간다.
강태호(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대표)
세상을 바꾸려면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힘겨루기가 가관이다. 장관이라는 권력의 남용과 검찰총장이라는 무소불위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을 구경하고, 부추기는 언론과 소위 그들 뒷전에서 이득을 챙기는 재벌과 죽어나는 민중들이 있다. 세상은 권력을 가진 자의 놀음인가? 그들이 민중의 숨통을 움켜쥐고, 재벌과 검찰과 언론을 움직여 농락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에게 권력을 쥐여준 자는 누구인가? 우리 민중들이 아닌가? 이 기막힌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떻게 견디어야 하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다시 광장에서 촛불을 들어야 하는가? 그러면 그 촛불의 힘을 배경으로 또 다른 권력이 탄생하고, 그 권력이 세상을 휘어잡는 놀음을 되풀이한다. 세상은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다면 촛불(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권력은 민중을 통제하기 위해 법을 만든다. 민중을 위하는 법도 만들지만 그들의 입맛에 따라 법을 만든다. 자신들의 구린 구석이나 위치를 뒤흔드는 법은 잘 만들지 않는다. 만들어도 누구의 눈치를 보는지 알맹이는 쏙 뺀다. 1년마다 이만큼 했다고 의정 자료를 뿌리며 자신의 공로를 자랑한다. 그러다가 4년마다 지역에 나타나 자신들을 찍어달라 한다. 법을 만들어 재벌들의 법적 규제를 풀어주고, 검찰과 손발을 맞추어 형량을 조정한다. 심하면 자신이 그 수혜자 되어 수억의 돈을 꿀꺽하고 불체포특권으로 버티기도 한다.
재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의 권익을 앗아가려 노동자를 탄압했다. 전태일의 분신으로 근로기준법이 바뀌고, 노동자의 권리가 차츰 보장되자. 노동자를 사무직과 생산직으로 갈라놓아 갈등을 조장한다. 이것도 여의치 않자.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갈등을 조장한다. 노동자의 분열이 바로 그들의 행복인 까닭이다. 노동자가 싸워야 할 대상은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임금뿐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성과 싸워야 한다.
언론은 무엇을 먹고사는가? 바로 광고수익이다. 그렇다면 먹여 살리는 것은 누구인가? 재벌이다. 재벌을 홍보하고, 그들이 내는 돈으로 언론이 살아간다. 잘 보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언론은 재벌을 한 방에 보낼 기획과 논리가 있고, 민중을 불러일으키는 재주가 있어서 재벌이 함부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론은 권력과 검찰과 재벌과의 관계에서 을이면서도 갑의 형태를 띤다. 여차하면 신상명세를 털고 자신의 몫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가 내는 돈 대부분 그들을 위해 써진다. 우리는 기껏해야 “시청자의 목소리”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그들이 짜놓은 판에 발을 들임으로써 그들에게 민중을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순수하게 참여했는데 결과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검찰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권력과 재벌과 언론과 민중들의 자세한 신상명세를 가지고 있다. 여차하면 한 방에 보낼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칼을 쥐고 있다 할 수 있다. 검찰에 복무하는 자들은 인품이 청렴해야 하고, 공정하고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신이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바탕으로 역모를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유사한 또 다른 집단인 군인 집단이 있다. 우리나라는 상관이 명령하면 일치단결하는 군인들이 군기의 힘으로 5,16 쿠데타, 12·12사태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하고, “화려한 휴가”로 민중을 죽이고 권력을 잡지 않았는가.
민중들은 자신의 동네(지역)에만 관심이 있다. 나라 전체를 위해 일해야 할 일꾼을 민원처리하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 일꾼들은 또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뒷전으로 하고, 다음에 다시 뽑혀야 하니 자기 동네 밥상을 잘 차릴 궁리만 한다. 그러니 나라도 이 모양, 동네는 저 모양이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좀 더 큰 정치를 하도록 동네 사람들이 감시하고, 격려하는 일을 늦추면 안 된다. 동네 사람들의 힘으로 그들에게 권력을 주었다 뺏었다 하지 않는가. 왜 우리가 가진 이 큰 힘을 이권 찾아 헤매며 허투루 쓰는가? 참 안타깝다.
권력이 지시하고, 판을 짜고, 법을 만들고, 청탁하고 금품수수 하며 갖은 이권을 챙긴다. 재벌이 권력에 돈을 대고 자본 축적에 걸림돌인 규제를 푼다. 걸핏하면 방 뺀다고(한국을 떠난다며) 위협하며, 한통속이 짜놓은 판에서 맘대로 놀며, 재물을 쌓는다. 언론은 광고수익을 챙기며, 그들의 입맛대로 여론몰이해 주고, 뒷돈 챙기며 제 배 불리고 여차하면 배신의 칼을 휘두른다. 검찰은 죄질이 무거운 재벌은 석방하고, 죄질이 가벼운 민중은 징역을 살게 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좌우명으로 삼고, 일관되게 수사하고,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부를 축적한다. 그사이에 죽어나는 것은 민중이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감언이설에 속아 질기게도 살았다. 아무리 촛불을 들고 불편부당함을 광장에서 외쳐도, 밀실에서 촛불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들을 위해 이것저것 법 만들어 공표하면 끝난다. 민중들의 요구를 법으로 대체하고, 위안 삼으라 한다. 법대로 세상이 돌아가면 좋으련만 그 법은 가진 자들이 빠져나갈 빌미를 제공해주고 진정으로 민중을 위해 작동하지 않는다. 애꿎은 사람만 축나는 꼴이다.
권력을 함부로 잡고 휘두르지 못하게 인품을 보고 잘 선출하고, 검찰은 공수처를 출범시켜 누구든지 공정하게 철저히 수사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 재벌에게는 종부세를 적용하고, 갑질과 노동 탄압을 중지 시켜야 한다. 언론은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아 민중들을 현혹하지 말고, 권력과 재벌과의 밀실 고리를 끊고, 바르고 곧은 자세를 가지도록 해야 한다. 민중은 깨어있어야 한다. 민중은 권력과 검찰과 재벌과 언론을 혁신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에는 투표 참여와 낙선운동으로, 검찰에게는 청탁 거부와 공정거래와 청렴결백으로, 재벌에게는 불매운동으로, 언론에는 시청거부, 광고 거부, 구독 거부 운동으로 맞서면 된다. 다수의 민중이 한곳으로 모은 엄청난 힘이 혁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촛불로 보여주지 않았는가.
권력, 재벌, 언론, 검찰, 민중 그 단어 자체는 아무런 힘도 없다. 그 단어를 휘두르는 인간이 문제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틀렸다. 지금 서 있는 자리가, 지금 지닌 인물이,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가 사람의 가치를 나타낸다는 말은 틀렸다. 자리는 관계없이, 지닌 것과 가진 것과 관계없이 그 사람의 품성(인격과 지성)이 누구를 (가진 자 1%냐 못 가진 자 99%냐) 어디(1%의 행복이냐 99%로의 행복이냐)를 향하고 있느냐에 있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 나는 어디(목적)를 향해가고 있는지. 나만의 욕심으로 남을 해치고 있지 않은지, 내 욕심으로 소중한 가정의 평화는 깨뜨리고 있지 않은지. 직장에서 승진을 위해, 실적을 위해 동료를 따돌리고, 울리고 고객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타인의 성취를 배 아파하고, 타인의 불행을 고소해하면서 불의는 모른 체하고, 비리는 그럭저럭 눈감아주며 사는 대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이렇게 해서 가려는 곳은 어딘가?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자유였다면 지금 자유로운가? 평화였다면 지금 평화로운가? 행복이었다면 지금 행복한가? 묻고 대답해보라. 세상은 결코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 타인은 결코 스스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를 바꾸지 않으면 타인과 세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타인은 경쟁의 대상으로 세상은 지긋지긋해도 살아내야만 하는 세상살이로 기다리고 있다. 세상을 바꾸려면 어찌해야 하나?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가는 방향을, 나를 바꾸어야 한다. 경쟁에서 협력으로, 무시에서 격려로, 질투에서 응원으로, 특혜에서 공정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적에서 다른 뜻을 가진 사람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나만의 행복이 아닌 우리의 행복으로 나를 바꾸고 방향을 바꿀 때, 내가 바뀌고 타인과 상생하며 세상이 바뀌어 간다.
강태호(참여자치군산시민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