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회원] 밤풍경

군산시민연대
202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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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풍경

 

40년 동안 소방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올해 퇴직하며 새로운 일을 하기로 했다. 그간 관심 많았던 심리 상담과 인권 관련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자고 마음먹은 것. 공부와 더불어 여러 가지 대외 활동을 하느라 서울을 자주 오가다 보니 나의 밤 풍경은 주로 버스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검푸른 산과 달, 별, 가로등이다.

 

일주일 중 절반을 군산 외의 도시로 움직이느라 고속버스와 KTX, 자동차 등 이동 수단에서 밤을 느낄 때가 많다. 가끔은 뛰어서 마지막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도 끊긴 한밤중에는 택시를 타고 뜻하지 않게 서울 시내의 야경을 즐기기도 한다. 고속버스에선 여름에 에어컨을 줄이고 겨울에 히터를 줄이며 항온 유지에 민감한 내 몸을 새삼 발견하기도 했고.

 

그렇게 일 년여를 살다 보니 국가인권위원회와 전라북도 특별자치도 인권강사로 위촉되고 소방 인권센터를 개설했고 심리 상담 센터를 열어 심리 상담과 진로코칭도 하게 되었다. 처음엔 나를 찾는 내담자가 있을까 걱정되어 지도해 주시는 슈퍼바이저 선생님께 고민을 말하니 선생님께서 “선생님이 꼭 필요한 내담자가 찾아올 겁니다.” 하고 격려해 주셨다. 차츰 여러 내담자를 만나서 같이 울고 웃으며 편안해하고 힘을 얻어 돌아가는 케이스를 보게 되니 상담 센터를 열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보람 있고 감사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나도 모르게 무리하여 이런저런 약을 들고 다니기도 하지만 몸 져 누우면 돌아다니지도 못하는데 그것마저 어디랴 싶어 신을 믿지 않지만 어떤 위대한 존재에게든 ‘이만하면’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내담자 중 직장인들이 있어 밤늦게 상담하고 돌아가면 상담실 뒷정리 후 조용한 영화동 원도심 거리를 조금 걸어본다. 가까운 거리에 엽서 그림 같은 동네 책방이 있고 동화 속 램프처럼 반짝이는 유리공방이 있고 나보다 더 늦게까지 야간 일을 하는 편집자의 작업실이 있어 거리가 조용히 빛난다.

 

그렇게 조용히 지나갈 줄 알았던 올해 어느 겨울밤.

내 평생에 다시 있을 것 같지 않던 2016년 겨울 장면이 재현되었다. 촛불집회를 열고 청와대까지 행진하던 날 발이 꽁꽁 얼어도 탄핵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더 뜨거웠던 그때 말이다. 그보다 더 오래된 1979년 계엄의 밤도.

TV에 나오는 서울 거리의 탱크 모습에서 느꼈던 부조리함과 모두가 쉬쉬하던 무거운 공기.

태초부터 있던 것처럼 느꼈던 통행금지가 1982년도에 해제되었을 때는 ‘캄캄한 새벽 1시에 밤길을 돌아다녀도 되는 권리’가 낯설었다.

그래도 내 생애에 다시는 통금이나 계엄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밤이었다. 그랬기에 12월 3일 계엄 사실을 듣고 본능적으로 춥고 떨려왔다. 하지만 2024년 12월 14일은 형형색색의 아이돌 응원봉과 광선검, 헤드랜턴에 갖가지 기발한 문구와 무지개 색깔로 나부끼는 깃발까지 촛불에 더하여 빛의 혁명이라고 할 만한 밤이었다. 그 밤에 국민 대다수는 한마음이었을 것이다.

여의도뿐만 아니라 군산 그리고 전국 어디에서도 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군산은 한길문고 앞에서 처음 하루 이틀은 몇십 명 모이다가 며칠 후부터는 몇백 명이 모였다.

 시민이라면 누구나 발언하고 행진하였다. 어른도 말하고 아이도 마이크를 잡았다. 노인도 아기도 반려견도 있었다. 행진도 하고 유아차에서 졸기도 하고 슬링백에서 똘망한 눈동자를 굴리기도 하며 거대한 역사의 한자리를 모두 다 함께 지키고 있었다.

 

 전국 곳곳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 직장인과 자영업자, 이주민, 성매매 여성, 성소수자, 비성소수자 다 같이 거리로 광장으로 나왔다. 평등한 집회를 위한 모두의 약속 “우리는 성별·성적지향·성별정체성·장애·연령·국적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한 참여자입니다. 모든 참여자는 여성·성소수자·장애인·청소년·이주민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대상화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을 안내하며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평등한 집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거룩한 밤이었다.

 

고위공직자는 국민이 권한을 위임하였기에 주목받는 사람일 뿐이지 권력의 주인공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엄연한 사실을 권력의 책임을 지기에는 많이 부족한 현재 권력자들에게 확인시키는 밤이었다.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이고 같이 있어서 안심이고 당신의 생각과 나의 마음이 우리의 용기와 행동으로 빛나던 밤이었다.


어떤 어둠이 와도 우리의 빛과 함성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단단하게 지킬 수 있기에 춥지 않고 든든한 밤이었다. 이제 앞으로의 밤은 우리 각자 생업과 할 일에 매진하며 편안히 잠드는 밤이 되기를.

 


나비( 레인보우 심리코칭&소방인권센터 센터장, 인디계 천만배우, 전직소방관 현재 심리상담&인권강사, 사람 마음과 세상 모든 인권에 관심이 많은 사람)